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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의병 역사 이야기 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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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이란

의병이란 우리 민족 특유의 애국·애족 정신으로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외세에 대항한 민군(民軍)이다.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같이 오랜 의병의 역사로 인하여 특유의 의병 정신이 조성되어, 승패를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결심하고 과감히 전투하는 것을 의병의 본분이라 여기게 되었다. 나아가 의병 정신이 곧 한민족의 특성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다.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라고 하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 민족은 역대 항중·항일의 침략 속에서 무력이 강한 국민성을 갖게 되었고, 이 때문에 어느 침략자로부터도 정복당하거나 굴복하여 동화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병자 양란의 의병과 조선 말기의 의병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관군의 무력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수십일 사이에 우리의 국토와 죄 없는 백성들을 짓밟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의병의 활약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규군인 관군이 붕괴되자 백성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 일어난 것이 의병이다. 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몇 십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개인의 재산을 사용하여 물자를 조달했으며, 부대마다 지켜야 할 군율을 정하고 일본군을 무찌를 것을 맹세하였다. 대장 아래에는 군사의 훈련, 물자의 조달, 전략 수립 등을 담당하는 참모들을 두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의병은 적을 기습하는 유격전 전법으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의병 활동의 원천은 무기나 병력 등의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충성과 의리를 바탕으로 한 결사 항쟁의 정신이었다.

일본군은 주요 도로를 따라 진격하고, 요충지에만 군대를 배치하였기 때문에 의병들은 후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괴롭혔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22일 의령에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이후 전국 각지에서 궐기한 의병들은 그 숫자가 한 때 관군을 능가하였다.

또 활약에 있어서도 관군보다 큰 전과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관군이 재정비되면서 의병의 숫자도 줄어들고 상당수는 관군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의병 가운데는 승려들도 참여하였는데,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 영규와 같은 이는 승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곽재우 의병군의 성격

곽재우는 경상우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의병운동을 통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선도한 인물이다. 우선 곽재우 군의 의병 구성 인사에서 초기에는 향촌사회의 혈연적·향당적 인사들이 주였지만, 후기에는 지역적·당파적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먼저 곽재우의 초기 의병은 1592년 4월 22일 기병한 후 5월에 들어서면서 초유사 김성일의 노력과 전국적인 의병의 봉기로 의병의 수가 급격히 늘어갔다. 이때 경상우도에서는 초유사에 의해 군사가 합군하는 경우가 많았다. 곽재우 군은 삼가의 윤탁 군과 합군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군세가 날로 늘어났다.

이처럼 곽재우 군은 군사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군을 조직화하고 군무를 분담할 필요가 있었다. 곽재우 군의 의병 초기의 지도부 인사 18명을 분석해 보면 신분별로는 돌격장과 선봉장 등의 소수를 제외하면 15명이 사족이며 지주 계층이었다. 출신지역별로는 의령 11명, 삼가 5명, 진주 1명이었다. 학연상으로는 조식 문인이 4명이며, 허언심은 곽재우의 매형이었다. 곽재우 군은 의령 지역의 인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학맥이나 혈연으로 연계되어 유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때문에 의병운동 초기 곽재우의 군사는 의령 중심의 향토방위군이었다. 아울러 곽재우 군에는 무관직을 역임한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전투력이 뛰어났다.

한편 곽재우 의병 조직의 하층부에는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재지사족들이 지주로서 가동이나 전호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또 자발적인 향민들이 참여하였다. 이후 초유사 김성일의 지시로 독자적으로 향병을 이끌고 있던 윤탁과 오운이 합군하면서 군사수가 늘어났다.

후기 의병 조직의 변화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의병을 통제하였는데, 1593년 김면의 사망 이후 경상우도의 의병 조직은 곽재우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곽재우 의병대장, 이광악 부장, 김덕령 좌영, 홍계남 우영으로 임명하여 의병을 재조직 한다. 이는 전선이 경상도에 집중되자 전국의 의병으로 활약하고 있던 의병들을 경상도를 중심으로 편제하여 통제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경상도 전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역연합군이었다.

의령지역의 의병활동

의령은 지리적으로 서북쪽은 산으로 막히고 동남쪽은 낙동강과 남강의 두 강이 형승을 이룬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의령사람들의 습성에 대해 ‘습속이 굳세고 용맹함을 숭상한다’ 라고 하였다. 의령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괄목할 만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지역민의 성향 등도 작용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년 의령지역의 의병활동은 곽재우의 창의 초기만 하더라도 주로 낙동강과 남강수계를 따라 의령지역을 자체 방어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최초의 곽재우의 창의에 가담한 사람은 심대승·권란·장문장·박필 등 10여명 이었으며, 이후 의령지역 의병의 활약으로 임진년 7월 무렵이 되면 삼가현의 군사까지 합류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곽재우와 그 휘하 17장의 군무가 분장된다. 대장 윤탁은 용연에 주둔하고, 선봉장 심대승은 장현, 기찰 심기일은 정호, 복병 안기종은 유곡, 수병장 이운장은 낙동강 서편, 돌격장 권란은 옥천대, 수병장 오운은 백암, 곽재우는 유곡 세간에서 전군을 통제하였다. 낙동강에서 남강의 정암에 이르기까지 60리 사이에는 정찰대가 총총히 배치되어 활동하였다.

의령의 의병부대는 지형, 지물과 뛰어난 전략으로 연전연승하였으며, 1594년 계사년에 경상우도가 곽재우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활동영역은 경상우도와 창녕·영산·현풍 등 일부 경상좌도까지 확대되었다. 의령지역의 의병활동은 전국의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의령을 포함한 경상우도를 지켜냄으로써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하고 후방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일본군의 전략에 막대한 차질을 주었다.

의령지역의 곽재우를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이, 육전에서의 일본군 최대의 적은 의병이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령지역의 의병활동의 공적은 바다의 이순신의 수군의 공적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양대 승리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